2024년 노벨문학상을 우리 한강 작가가 받았던 순간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벌써 2025년 수상자까지 나오다니 ‘벌써 1년이 지난거야?!’하고 말았습니다. 잘 모르는 작가님인데요, 서치를 해봤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몇권의 작품에 대한 번역본이 나와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 중 ‘사탄탱고’라는 작품을 중점적으로 파봤습니다.

줄거리 위주로 작성했습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미리 알려드리고요. 글의 순서는 책을 기본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번호를 매겨 참고하시기 편하게 했습니다. 대명사 위주로 오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급하게 작성하느라 그렇습니다.
1.
끝도 없이 내리는 빗물과 진흙탕이 생활을 마비시킨 변두리 농장 집단이 있습니다. 곡물 창고는 텅 비었고, 가축은 병들었으며, 거주민들의 대화에는 늘 술 냄새와 의심이 배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살피며 눈치를 보고, 내일이 오늘과 다르리라는 기대조차 잃어갑니다. 이처럼 멈춰 선 풍경 속에서 가장 자주 오르내리는 이름은 한때 떠났다가 자취를 감춘 듯했던 이르미아스입니다. 그는 예전에 어떤 약속을 했고, 누군가에게는 희망의 흔적이었으며, 다른 이들에게는 불길한 예감이었습니다. 어느 날 소문이 현실로 변하듯, 이르미아스와 동행자 페테르가 폭우를 가르며 돌아옵니다.
2.
두 사람의 재등장은 굳어 있던 늪에 던져진 돌처럼 마을 전체에 파문을 일으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모아 앉히고, “이곳에서는 더는 버틸 수 없다”는 단호한 진단을 내립니다. 동시에 “모두의 자금을 모아 새로운 터전을 세우자”라는 청사진을 펼치며, 각자 흩어져 생존을 모색하던 생활을 ‘함께’라는 구호 아래 묶어 냅니다. 피로와 빈곤에 짓눌린 주민들은 말의 권위와 문서의 제스처에 이끌려 고개를 끄덕입니다. 한동안 누구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던 자리에서 외부 인물이 결정을 대신하는 듯 보이는 순간, 책임은 조용히 바깥으로 이동합니다.
3.
하지만 분위기는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술집에서는 뒷말이 돌고, 추문과 망상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집니다. 어른들은 신경질적으로 서로의 창문을 엿보거나 헛간을 뒤지며, 작은 탈주라도 발견하면 침소봉대해 떠들어댑니다. 재난의 징후는 언제나 가장 취약한 이에게 먼저 도착합니다. 돌봄에서 밀려난 아이 에쉬티케는 굶주림과 고립 속에서 점점 극단으로 몰립니다. 어른 누구도 끝까지 책임 있게 손을 내밀지 못하고, 연민과 무관심, 간섭과 회피가 뒤엉킨 채 아이 주변을 선회합니다. 결국 에쉬티케에게 닥친 파국은 이 공동체가 외면해 온 현실을 잔혹하게 드러내며, 이후 전개에 지울 수 없는 그림자를 남깁니다.
4.
이르미아스는 담담한 목소리와 설득의 언어로 사람들을 달랩니다. 자신의 계획이 모두를 구할 수 있다고 단언하지는 않지만, 여기보다 나을 것이라는 상상을 끊임없이 불러옵니다. 페테르는 실무를 맡아 인원을 모으고 돈의 흐름을 정리합니다. 장부와 봉투, 서류와 도장이 등장할수록 “이 일이 실제로 굴러간다”는 감각이 커집니다. 누군가는 계속 의심하지만, 지친 다수는 의심을 유지할 기력조차 없습니다. 낡은 막사와 헛간을 떠나 어딘가로 향하려는 준비가 조금씩 진행되는 동안, 빗줄기는 더 굵어지고 길은 더 미끄러워집니다. 이동은 시작됐지만, 목적지는 여전히 말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5.
이 작품의 전개는 직선처럼 보이면서도 자꾸 옆으로 미끄러집니다. 같은 시간이 다른 이의 눈을 통해 다시 펼쳐지고, 어떤 장면에서 들은 말이 다음 장면에서 뒤집히거나 공백으로 남습니다. 독자는 사건의 순서를 붙잡고 싶지만, 인물의 내면과 주변 풍경에 대한 과밀한 묘사가 그 욕망을 방해합니다. 이 느린 진행은 마을이 처한 정지의 감각을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파합니다. 움직임은 있으나 변화는 거의 없고, 사람들이 걷는 길은 결국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원형 궤도처럼 보입니다.
6.
결정적 국면은 자금입니다. 새로운 삶을 위한 공동 기금이라는 명분 아래 모인 돈은 주민들의 기대와 불안을 함께 끌어안은 상징이 됩니다. 누군가는 마지막 남은 생활비를 털어 넣고, 또 누군가는 망설이다가 뒤늦게 합류합니다. 모금이 마무리되는 시점, 이르미아스는 관청의 문을 두드립니다. 그는 일련의 사건을 보고서 형태로 정리해 상부에 제출하고, 공손한 어조로 계획의 방향을 달리 제시하기도 합니다. 여기서부터 독자는 그가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것인지, 자신을 위해 장치를 마련하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그의 언설은 현실을 움직이는 힘을 지닌 듯 보이지만, 그 힘이 누구에게 복무하는지는 끝까지 선명하지 않습니다.
7.
떠나겠다는 말이 난무하던 나날 뒤로, 실제로 길을 나선 이도 있고 발길을 돌린 이도 있습니다. 행렬은 흐트러지고, 각자는 자신만의 이유로 흩어지거나 술집으로, 빈 창고로, 행정기관의 문턱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계획은 종이 위에 남고, 약속은 말 속에서만 빛납니다. 하지만 현장의 삶은 여전히 진창 위를 걷습니다. 둘러보면 풍경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고, 귀에 맴도는 이야기들만 늘었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속았다고 생각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어차피 달라질 게 없었다며 체념합니다. 그 사이 가장 약한 존재는 사라지고, 남은 이들은 그 사실을 서로에게 떠넘기며 시선을 피합니다.
8.
결말에 이르러도 명확한 봉합은 없습니다. 구원은 약속되었으나 입증되지 않았고, 재건은 계획되었으나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관청과 교회, 술집과 폐농장 같은 상징적 공간을 오가던 발걸음은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온 듯한 기분을 남깁니다. 전진과 후퇴를 번갈아 밟는 춤의 스텝처럼, 이 집단의 시간은 앞으로 갔다가 곧장 뒤로 물러납니다. 사람들은 외부에서 온 권위의 말에 기대어 결정을 위탁했고, 그 대가로 어떤 책임도 온전히 붙잡지 못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는 보호막을 얻고, 누군가는 삶의 바닥으로 추락했습니다.
9.
결국 남는 것은 풍경과 리듬입니다. 지독한 비, 미끄러운 진흙, 고장 난 설비에서 새어 나오는 쇳소리, 텅 빈 창고의 곰팡내가 장면마다 다시 떠오릅니다. 인물들의 발화는 서로 엇갈리고, 종종 자기 변명으로 흐르며, 때로는 믿음으로 위장한 체념을 드러냅니다. 이르미아스는 끝까지 규정되지 않는 존재로 머물고, 페테르는 균열을 봉합하는 듯 움직이다 어느새 균열을 관리하는 위치에 서 있습니다. 주민들은 구원을 원했으나 그 바람 자체가 조종의 통로가 되었고, 의심은 있었지만 피로가 더 컸습니다.
10.
이 줄거리는 사건 목록이라기보다, 감각과 분위기, 시선의 이동이 그려 내는 거대한 원의 궤적에 가깝습니다. 떠나려는 의지와 되돌아오는 현실, 누군가의 언설이 권위로 굳어지는 과정, 그리고 가장 취약한 존재에게 먼저 도착하는 폭력의 양상이 서로를 비춥니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독자는 논리적 결말보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는 체감과 마주합니다. 전진과 후퇴가 교차하는 탱고의 박자처럼, 이 세계의 시간은 계속 반복될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그 반복 속에서 사람들은 또다시 어떤 말, 새로운 서류, 다른 약속에 기대어 내일을 맡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실제 변화를 낳을지, 또 다른 회귀의 예고일지는 누구도 확신하지 못한 채로요.
11.
이렇듯 ‘사탄탱고’의 이야기 흐름은 하나의 집단이 외부 권위를 매개로 희망을 조직했다가, 그 희망이 장치로 작동하며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을 따라갑니다. 아이의 비극은 그 여정의 윤리적 중심을 형성하고, 이르미아스의 말과 행동은 구원과 조종의 경계를 끊임없이 흐립니다. 빗물과 진창, 텅 빈 건물과 술집의 소란이 배경을 채우는 동안, 사람들은 자기 책임의 자리를 피하고 약속의 형식에 마음을 맡깁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이미 종말은 예견되어 있었던 것처럼, 모든 것은 어느새 조용히 원점으로 복귀합니다.